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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국  열  차



Issue!
엇갈린 평을 받는다는 건 참 굉장한 거다. 모두들 당연히 다른 생각을 하고 살지만 굳이 그걸 드러내서 의견을 주고받을 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거 아닌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꽤 재미있게 봤다.

SF/환타지 장르는, 그 세계를 구축하는 데 있어 훨씬 더 논리적이어야 한다더라. 규칙, 그리고 그를 설명할 수 있는 이성적인 이유, 뭐든 가능해서 더 자유로워 보이지만 실은, 작가가 그만큼 더 계산적이어야 한다는 것. 그렇지만 감독은 봉테일님. 그가 여기저기 테일러링 해두었을 디테일들 찾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그만큼 의문점도 많이 생겼다. 원작 만화를 읽지 않은 입장이라 어디까지가 누구의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재미있었던 점들과 궁금한 점들을 나눠보고 싶다.

*스포일러 있어요*

It's a small world, after all
어떤 무한(?) 동력으로 인해 17년째 돌고 돌고 돌고 있는, 멈추지 않는 작은 지구. 그 안에는 아주 밑바닥부터 아주 부유한 이들까지, 권력의 정도에 따라 등급이 나뉘어 칸에 탑승해서 살고 있다. 그 권력은 탑승시 구매한 티켓가에 의해 나눠진 것인데, 이들이 사실 원래 어떤 삶을 살고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보스턴 오케스트라 수석 바이올리니스트라도 처음에 꼴등칸에 올라탔다면 꼴등칸 사람인 거니까. (그렇지만 예술적 재능을 가진 자는 금방 일등칸의 삶을 누릴 수 있게 된다! 하! )
꼴등칸의 사람들은 흑인에서부터 동양인 등 다양한 인종이 어우러져 살고 있다. 그런데 주인공들이 앞칸으로 나아갈 수록, 인구의 다양성은 사라지고 백인 위주로 구성된 일등칸 승객들이 보이는데, 이것도 의도적인 거겠지.

Integral Violence
그 기차의 질서를 유지하는 실질적인 '군인'들은 영어로 상명하달을 받지만, 가끔 일본어로 의사소통을 하더라. 또 그 밑에서 피튀기며 싸우는 자들은 복면을 했고. 개인적으로 받은 느낌일지는 몰라도 복면군단은 테러리스트, 아랍, 러시아가 떠올라서 섬뜩했다. 전쟁의 주범들이잖아. 전쟁으로 '질서를 유지'한다는 걸까. 세상에는 전쟁이, 불가결하다는걸까.

In the name of the Belief
자신의 팔과 다리를 식량으로 내놓는 사람을, 어느 누가 믿고 따르지 않을 수 있을까. 문제는, 이 인물도 인간이고, 이를 따르는 자들도 인간이라는 거. 무엇이 옳은 것이고 무엇이 그른 것인지, 내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한번 더 생각해봐도 모자란다. 그 생각이라는 게,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거든. 그리고, 생각보다 쉽게 바뀌지 않거든. 
영화가 끝나고 나니, 나부끼는 붉은 십자가 그려진 깃발과, 온 몸에 폭탄을 두른 여인, 딸을 죽이는 아버지, 집단 자살한 미국의 한 마을, 전기고문을 받는 동성애자들이 떠올랐다. 

I want YOU
윌포드가 붉은 쪽지를 보낸 자란다. 그는 대체 왜 자신의 후계자를 꼬리칸 사람중에서 골랐을까? 
앞칸 사람들은 워낙 그렇게 부족함 없이 자랐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꼬리칸 사람들을 본 적도 없고, 존재를 잊고 산다. 하지만 '기차'가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 꼬리칸 사람들은 필수다. 앞칸 사람들이 '희생'을 할 수는 없으니까. 기차가 잘 돌아가려면, 꼬리칸 사람들을 항상 자기들 밑에 두고 질서를 유지해야 하는데, 커티스가 그러기에 적격이라 판단했을까? 이미 길리엄의 '선행'으로 인해 개과천선한 인물인데? 
사실, 난 윌포드가 그냥 심심해서 그랬을 거 같기도 하다. 기차세계의 '신'으로써 신탁을 내린거지. 돌고도는 일상에 재미있는 사건 하나 만들어보려고. 뭐, 진짜로 찾아올 줄은 몰랐겠지만, 그럼 그냥 넘겨주면 그만이고. 커티스는 이 기차의 모든 칸을 다 가봤으니, '질서 유지'가 필수라는 걸 알고 있겠지. 그리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이자가 열받아서 앞칸 사람들을 몰살한다고 해도, 결국 기차는 다시 채워질 것이고, 칸마다 사람이 나뉘어질 거라고, 윌포드는 생각했을 것이다.

Iona
(이렇게 쓰는게 맞나 모르겠다만 다 I로 시작하게 썼으니까 헴헴..) 
요나는 기차 안에서 태어난 소녀이다. '흙'이 뭔지도 모르고, '땅'을 밟아본 적도 없다. 그나마도 감옥에 갇혀 살아서, '세상'을 제대로 본 적도 없다. 그런 그녀가, 이 달리는 열차를, 돌고도는 세상을, 멈춘다. 이 끔찍한 뫼비우스의 굴레를 끊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것이 작은 소녀라니,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랑 봉감독님은 '소녀'의 무한능력에 대해 뭔가 공유하고 계신듯 하다. 

영어제목이 왜 Snowpiercer인지 궁금했는데 요나(고아성)를 가리키는 말인갑다. 사전에 Piercer가 뚫는 것 말고도 '꿰뚫어 보는 눈'이라는 뜻이 있다니 말이다. ('설국열차'라니까 보지도 않은 일본 영화가 먼저 생각나버려서 조금 아쉽다. 제목이 그냥 <눈> 이었어도 좋을법 했는데...ㅎ)


Inquiries
자, 여기서부터 궁금한 점들. 
봉감독님이 한국사람이니까 한국인 부녀를 '열쇠를 쥔' 인물로 설정한건 알겠는데, 기술력을 갖췄지만 서구의 권력에 매여 자유롭지 못한걸 상징하려 했을까? 이들은 기회의 손길이 오지 않았다면 계속 거기 그렇게 갇혀있었을건가? 아님 누군가 먼저 시작해서 거기 따라가다가 자기 원하는 걸 하려고 기회를 엿본걸까? 마지막 순간에 배신을 하는건 우발적이었던걸까? 7인 동상(그야말로 동상!) 을 보면, 엔진을 멈춰야만 나갈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왜 굳이 첫 칸까지 문을 열어주며 따라갔나?
그리고 요나의 투시력이 그렇게 중요하고 놀라운 능력인데, 커티스는 왜 그리 캐쥬얼하게 '밥은 먹었니?'라고 물어보듯' 너 투시력 있니?'라 물은걸까...하긴 17년째 똑같은 궤도를 돌고 있는 기차 속 세계에선 그정도는 암것도 아닌걸까.


In the End
74%를 수동으로 유지하겠다면, 언젠가는...앞칸 사람들도 통제해야 할 날이 왔을거다.
기차가 그 전에 멈춰서, 참 다행이다.

요나는, 관습에 얽매이지 않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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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쯔가 본 : 영화 <헬프(The Help)>  (0) 2011.11.04
방금 처음으로, 자진해서, 홀로 영화를 보러 다녀왔다.
영화가 보고싶어 개봉일을 기다린 적은 많지만 정작 개봉 당일에 영화를 본 적은 없었는데 오늘은 희한하게도, 동행이 없는데도, 집에서 편히 쉬다 나가는 것이 귀찮을법 했을텐데도, 영화관으로 발길이 닿았다.


이야기가 있는 포스터_



얼마 전, 길을 가다 영화 포스터를 하나 봤는데 노란 배경이라 눈에 확 띄었다. 그리고 네 명의 여자가 있는데 엇, 벤치에 앉은 여인네들의 머리모양이 심상치 않은 것이다. 헤어스프레이를 잔뜩 뿌려 부풀린 머리에 화려한 꽃무늬 치마! 우와..이것은 딴따라땐스홀에서 추구하는 5,60년대 스타일이 아닌가. 나는 뮤지컬 '헤어스프레이'같이 음악과 춤이 있는 화려한 영화가 아닐까 하고 잠시, 아주 잠시 생각했다. (물론 아주 몇 초간이었다)

포스터를 조금 더 뜯어보면 이 영화는 5,60년대가 배경이고, 인종차별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고, 가운데 앉아 우리를 응시하는 저 아이가 주인공격일 거라는 걸 알 수 있다. 뭐 영어를 좀 하는 사람이라면 제목인 '헬프'는 흑인 가정부를 부르는 용어라는 것까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 숨어있는, 여러가지 메시지가 있다.
(영화를 보고 나니 내가 보지 못했던 부분이 다시 보여서 몇 가지 적어볼까 한다. 스포일러 지뢰는 알아서 피하길)
가운데 앉아있는 여자아이는 금발 머리에 파란...눈인지는 보이지 않지만 어쨌든 백인이다. 그녀는 옆에 앉은 여자에 비하면 화려하지는 않지만 예쁜 옷을 입고 있다. 옆에 앉은 여자는 절대 손에 물도 묻힐 것 같지 않게 생겼다. 저런 옷과 저런 머리는 사교 모임에나 어울리는 모습이지. 피부색이 밝은 이 두여자는 벤치에 앉아있다. 그런데 시선을 보자. 가운데 앉은 아이는 우리를 응시하고 있지만 옆에 앉은 꽃무니옷의 그녀는 손톱의 때라도 감상하는 듯, 다른 곳을 보고 있다. 현실을 외면하고 모든것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그녀의 캐릭터를 보여주는 것 같다.
이제 왼쪽에 서 있는 흑인 여성들을 보자. 앞치마를 맨 것 보니 집안일을 하는 사람인 것 같은데, 어, 둘의 옷이 똑같다. 가정부 유니폼인가보다. 자세히 보니 벤치에 앉은 아이들의 엄마뻘 정도 되어보이는데, 옆에 서서 있다. 애들은 비킬 생각도 안한다.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머리에 피도 안마른 것들에게조차 공경을 받지 못하는 모습이다. 어 그런데 재밌는 것은 미니(어이쿠, 이름이 나와버렸네. 근데 정말 강렬한 그녀의 캐릭터와 이름이 너무 잘 어울려서 자꾸 부르게 된다;) 의 손이다. 공손하게 앞에 포개어져 있지만 얼굴을 보니 뭔가 뒷담화를 하는 것 같다. 그리고 맨 왼쪽에 서 있는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인 에이블린은 고개를 약간 기울여 미니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데 어허, 손이 주머니에 들어가 있다! 무슨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영화의 얼굴인 포스터를 만들면서 이렇게 공을 들이는 제작자는 여태껏 못 본 것 같다. (있다면 제보 부탁) 보기 전에는 궁금증을 자아내고, 보고 난 후에는 보이지 않던 조각들이 보이면서 다시 찬찬히 보는 재미를 준다.



우리를 도와주는 이들, 우리가 잊고 사는 이들_

영화의 제목을 짓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책이 원작이라고 하니 책의 저자가, 아니, 편집장인가? 어쨌든) 제목 '헬프'는 이 작품을 한마디로 설명하는 단어, 그야말로 굉장한 센스이다. 우리가 '도우미'라고 하듯, 외국에서도 가정부를 'The Help'라고 부른다. Helper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도움을 주는 모든 이를 지칭하는 단어이지만 the help는 미국에서 가정부를 뜻하는 고유명사이다. 동시에 이 작품을 관통하는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기도 한다.
처음 '헬프'라는 제목을 봤을 때 비틀즈의 노래 'HELP!'가 귀에서 맴돌며 그 파란 옷을 입고 한 명씩 수기신호(手旗信號)로 HELP를 외치는 그림이 동동 맴돌았다. 뭐 아주 틀린것은 아닌것이, 이 앨범이 나온 해가 1965년, 그리고 영화 <헬프>의 배경이 1960년대라는 것이다. (http://en.wikipedia.org/wiki/Help!_(album))
1960년대 한국에선 우리 부모님이 막 초딩 또는 유딩의 단계에 있었을 테지. 그런데 여기 포스터에 앉아있는 주인공 아이 '스키터'가 이십대 후반으로 나온다..그렇다면 그녀는 우리 할머니 뻘? 이라는 셈이 되지. 요는, 이 이야기가 아주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할머니 뿐만 아니라 우리 아빠도, 엄마도 존재하던 시절이다. 
그 시절 미국에서는 흑인과 백인이 'Separate but Equal'이라는 말도 안되는 슬로건 하에 버스의 자리도, 주거지역도, 심지어 화장실까지도 따로 사용했어야 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했어도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번번한 직장은 구하기 힘들었고, 그마저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은 또다시 가정부가 되어 부모와 같은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문장에서 '유색인종' 이라는 말을 '외국인 노동자'로 바꿔보자.

"아무리 공부를 많이 했어도 외국인 노동자라는 이유로 번번한 직장은 구하기 힘들었고.... "

'따로 그러나 평등하게'라는 개떡같은 슬로건은 없지만 우리는 저도 모르게 그들과 나 사이에 벽을 만들고 만다. 어릴적 유럽에서 살며 동양인이라 손가락질 받았던 기억때문에 나는 그렇지 않을거다 생각했는데, 부끄럽지만 나도 벽이 있더라. 더 충격적인건, 나도 모르게, 백인과 흑인과 동남아시아 외국인들을 다르게 대하고 있다는 거였다.

일요일마다 혜화동 성당 앞에는 동남아시아 장터가 열린다. 망고에서부터 핸드폰까지 없는 게 없다. 어느 일요일, 나는 혜화동을 지나는 버스를 타고 깜짝 놀랐다. 버스 안에 들어가자 마치 동남아의 어느 도시에 도착한 듯,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가득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리가 듬성듬성 있었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그 옆에 앉지 않았다. 갈 길이 먼 것도 아니었긴 하지만 왠지, 그 사람들 사이에 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서울에서 가장 외국인을 쉽게 만날 수 있는 길은 바로 지하철 6호선을 타는 게 아닌가 싶다. 이유는 바로 이태원 프리덤~이 아니라 이태원 때문이다. 외국인 관광객도, expat(국외 거주자.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도 이태원에 넘쳐난다. 그런데 지하철에서 안경을 끼고 책을 읽고 있는 흑인과, 맥주병을 홀짝대는 백인을 본 적이 있다. 부끄럽지만 후자를 봤을 때보다 전자를 봤을 때 더 놀랐다. 내 머릿속에서 흑인=교사 의 공식이 성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인은 영어를 잘 하고 학원이나 학교에서 영어강사를 할 것이며 동남아 사람들은 어느 공장에 다니거나 농촌 노총각과 결혼한 사이일 것이며, 흑인은 좀 무섭다.'

정말 미친듯이 부끄럽지만 내 머릿속엔 윗 문장이 어딘가에 박혀 있는 것 같다. 방송 등 각종 매체를 탓할 생각은 없다. 대부분의 백인이 영어강사를 하고 있고(영어를 정말 못하는 프랑스녀석조차 백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영어학원에 취직되는 세상이니) 동남아 사람들이 공장 등 일명 3D업종에서 많이들 일하고 있고 흑인은..말투가 좀 무섭....?! 뭐 어쨌든 많은 부분에서 일치하긴 한다. 그러나 백인 중에서도 영어권이 아닌 곳에서 온 사람들도 굉장히 많고, 미군중에는 자기 이름도 잘 못쓰는 바보들도 있다. 우리나라 유명 대학으로 유학온 동남아 학생들도 있을 것이고 흑인은..흑인이라서 무섭다는건 말도 안되는 일이다. 안다.

내 안에서 이 편견의 벽은 그다지 높지는 않다. 하지만 문지방을 지날 때 잘못하면 발이 찧어서 아프듯, 이렇게 어떤 계기로 벽을 발견할 때마다 벽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 벽을 넘어가는 행동이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꾸 사고나 치고 다니는 미군 말고는 우리나라에서 외국인의 존재는 필요불가결한 존재가 되었다. 유치원, 아니 말도 제대로 못하는 아이들이 다니는 시설부터 원어민 교사 열풍에, 가방끈이 길어진 한국 젊은이들이 기피하는 3D업종, 농사짓는 노총각에겐 시집가려 하지 않는 아가씨들. 각자의 사연을 들고 바다를 건너온 외국인들이 이 자리를 메꿔주고 있다.

좋아하는 독일 밴드 Wir Sind Helden의 노래중에 아주 긴 제목의 노래가 하나 있다.
<Ich werde mein Leben lang üben, dich so zu lieben, wie ich dich lieben will, wenn du gehst>
"나는 평생 연습할 것입니다. 당신을 사랑하도록. 당신이 떠날 때 내가 당신을 사랑할 것 처럼"

혼자 살 수 있는 인간은 없다.
공기와 물, 빛과 바람, 벼농사를 짓는 농부, 쓰레기를 치워주는 환경미화원, 그리고 정치인들조차도.
내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고,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그 사람이, 그 존재가 나를 떠난다면? 내 앞에서 사라져 버린다면?

그러니 감사하자. 우리가 가끔 잊고 사는 존재들을 위해.

자. 나의 고백은 끝났다. 하지만 부끄러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면 몇번이고 더 고백할 것이다.

그대들도 준비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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