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틀에 팽팽하게 고정시켜둔 천에 글줄과 음악줄이 바삐 오가며 그림을 그려나간다. 바깥의 여백이 더해지면 더 아름다우리. 

(가야십이지곡을 보고 왔더니, 말투가...)

한 마디로, 무대가 좁다. 한계 내에서 표현하려고 나름대로 애를 썼지만, 날개가 꾹꾹 눌려 접혀있는 새 같아서 안타까웠다. 더 큰 무대에서 만날 날을 기대한다.


창작자들은 관객에게 쥐어줄 실타래를 풀어내는 리듬을 잘 짠 것 같다. 캐릭터의 행동에 대한 의문이 들 때마다 노래가 있었다. 신탁을 받아 길을 떠나는 우륵의 내면적인 갈등을 노래로 풀지 않았더라면 우륵이라는 인물에 공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관객은 인물에 감정이입을 하며 관극하지만, 자신의 생각과 다른 행동을 했을 때 그 의문이 풀리지 않으면 이야기를 따라가기 거부하고 뒤에 남는다. 게다가 신이라던가 운명이라는 말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나로서는 시작과 동시에 물음표를 던져대기 바빴다. 하지만 노래가 나를 달래주었다. 결국 우륵은 나고, 내가 우륵이다. 나에게만 들리고 보이는 신탁. 신탁은 선택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 내린 운명, 굴레. 이 길을 가고 있는 나는 나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다. 


'소리를 모으러 떠나는 여행'에서 단연 중요한 것은 소리이다. 열두줄 금을 그저 소품이 아닌 하나의 캐릭터로써 극 안에서 활약하게 한 것, 그리고 니문과 소율을 구하고 사다함의 칼을 이긴 그 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주지 않은 것은 창작자의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공연을 본 다른 친구는 그 부분이 공허했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 가야금 소리가 귀를 통해 듣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역설적으로 하려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물론 '무언가 빼먹은 듯한' 느낌이 들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니문도, 소율도, 심지어 사다함도 독백의 형식을 빌어 '그 음악의 힘'을 증언한다. 머리로 이해하기는 했지만 마음으로 느끼지는 못했다. 그럴 여유를 주지 않은 채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연출이 아쉬웠다. 작은 무대에 적은 예산, 인원과 소품을 활용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알지만, 인물들의 감정선까지 전부 수신호로 운영한다는 느낌이었다. 깔끔하게 담긴 일본식 도시락 세트에, 조금씩 간이 덜 되어있는 것 같았다. 무슨 의도인지는 알겠는데, 나는 더 강렬한 맛을 원했다. 눈물을 흘리고 싶었다. 배우에게 사이를 연기할 여유를 주면 어떨지. 


본 날에 바로 썼지만 새벽까지 이어지는 생각에 지우고 또 지우고... 그러다가 사실이 기억속에서 뒤틀렸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느낌은 마음자리에 은은하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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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내가 지금 이걸 왜 읽고 있지? 인문학 고전을 읽어도 시간이 모자랄 판에 웬 좀비 타령이람!'


내가 읽자고 투표해서 뽑아놓고는 갑자기 책이 너무 미워지기 시작했다. 내용도 머리에 안 들어오고, 페이지도 안 넘어가고, 밑도 끝도 없는 작가의 진지함이 어이가 없어서 한숨을 푹푹 쉬면서 건성건성 보고 있었는데...


"Remain entertained!" 


이 말에 정신이 확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 책은 단지 가상의 좀비로부터 나를 보호하자는 말도 안되는 픽션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좀비처럼 눈 앞에 보이지는 않지만 좀비만큼 끈질기게 출몰하여 우리를 괴롭히는 스트레스와 우울감으로부터 벗어나 인생을 주도적으로 살 수 있는 팁이, 3류 진지개그물을 가장한 이 책 속에 녹아들어있었다.


1. One Goal 

2. Establish a destination

3. Gather Intelligence and Plan your Journey

4. Get in Shape

5. Avoid Large Groups 

6. Train Your Group

7. Remain Mobile

8. Remain Invisible

9. Look and Listen

10. Sleep!

11. Refrain from Overt Signals

12. Avoid Urban Areas


1. 건강하게 잘 살자. 

2. 목표를 정하자.

3. 지식을 쌓고 계획을 세우자. 

4. 운동도 열심히 해야 한다. 

5. 사공이 너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 

6. 타인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자. 

7. 정체된 삶에서 벗어나자.

8. 나대지 말자.

9. 항상 주위를 돌아보자.

10. 충분히 쉬자. 

11. 요행을 바라지 말자. 

12. 도시를 벗어나자.


이렇게 읽어도 되지 않을까.

책 쓰는 건 저자 맘이지만 받아들이는 건 독자 맘이니까.



제이컵을 위하여

저자
윌리엄 랜데이 지음
출판사
검은숲 | 2013-08-19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열네 살, 살인죄로 기소돼 법정에 선 검사의 아들 도대체, 가족...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나는 소설을 잘 못 읽는다. 

아마도 어릴 적에 트라우마가 생긴 것 같다. 

한국에서 교육받았다면 누구나 그렇듯 세계고전문학을 읽도록 강요받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시키는 일은 반대로 하는 청개구리 피를 타고난지라, 초등학교 때는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 눈이 나빠져놓고는, 중학교 때 들어서는 어른들이 읽으라고 읽으라고 하길래 피하고 피하다가 결국 집어든 소설 때문에 책을 싫어하게 되었다. 소설도 자기와 궁합이 맞는 게 있다고 하는데, 나와 궁합이 너무 어긋난 녀석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은 누군가 읽고 자세하게 추천해준 작품이 아니고서야 서점에서 소설을 사는 일은 드물다.

'법정 스릴러'. 그리고 표지를 뚫고 나를 노려보는 아이의 표정에서 나는 이 책은 나랑 잘 맞을 거라는 느낌을 받았다. 멘탈리스트 류의 미드 팬인데다, 청소년 범죄에 관심이 많아서였다. 1월에 미리 책을 사다놓고 손도 못 대고 있다가 마침 구정 연휴 끝자락에 혼자 집에 남겨졌을 때,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반나절만에, 내 한 손으로 들기에도 힘든 이 커다란 책을 다 읽었다. 기대 이상이었다. 책 투표할 때 소개글에서부터 앞과 뒤 표지까지 보니 대놓고 어떤 내용일지 느낌이 확 오는데도, 마지막 장까지 긴장감을 유지하는 작가의 기교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화자는 아이의 아빠이다. 왜 엄마가 아닌 아빠로 설정을 했을까. 작가가 남자이기도 했지만 이 책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 자기 자신을 위시한 우리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는 엄마가 아니어야 했다는 판단이 든다. 나는 엄마가 아니지만, 엄마라는 존재가 된다면, 아홉달 동안 한 몸에서 뛰는 두 개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던 기억을 가진 여자가 된다면, 마음속으로라도 아이를 의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일 것 같다. 나는 '혹시' 나 '설마'라는 말을 사전에서 지우고, 어두운 구석으로부터 의도적으로 눈을 감았을 것이다. 아이가 제 몸의 일부였던 것을 온 몸으로 체험한 어머니와는 달리, 아버지들은 항상 자식이 자신의 핏줄인지 의심하고 있고 여기엔 어떤 용어까지 붙어있다는 것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있다.  그래서 조금 더 독자가 잘 따라갈 수 있고, 또 때론 냉정하게 질문을 던질 수 있는 화자로, 아버지를 선택한 것이 아닐까. 

반나절을 한 아이의 아빠로 살아보고 나니,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버지라는 특수한 위치에 있는 한 인간의 심리를 잘 묘사한 작품이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법정스릴러물을 글로 읽어본 건 처음인데,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것과는 다른 매력이 있더라. 내가 감독이 되어 캐스팅도 하고, 편집도 해가면서 머리에 그리는 재미가 쏠쏠했다. 법정 공방에선 어려운 말이 많아서 조금 더디게 읽히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전체적인 번역이 꽤 매끄러워서 좋았다. 곧 영화화 된다는데 어떨지 정말 궁금하다. (기대하겠습니다 워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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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N  O  W  P  I  E  R  C  E  R
설  국  열  차



Issue!
엇갈린 평을 받는다는 건 참 굉장한 거다. 모두들 당연히 다른 생각을 하고 살지만 굳이 그걸 드러내서 의견을 주고받을 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거 아닌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꽤 재미있게 봤다.

SF/환타지 장르는, 그 세계를 구축하는 데 있어 훨씬 더 논리적이어야 한다더라. 규칙, 그리고 그를 설명할 수 있는 이성적인 이유, 뭐든 가능해서 더 자유로워 보이지만 실은, 작가가 그만큼 더 계산적이어야 한다는 것. 그렇지만 감독은 봉테일님. 그가 여기저기 테일러링 해두었을 디테일들 찾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그만큼 의문점도 많이 생겼다. 원작 만화를 읽지 않은 입장이라 어디까지가 누구의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재미있었던 점들과 궁금한 점들을 나눠보고 싶다.

*스포일러 있어요*

It's a small world, after all
어떤 무한(?) 동력으로 인해 17년째 돌고 돌고 돌고 있는, 멈추지 않는 작은 지구. 그 안에는 아주 밑바닥부터 아주 부유한 이들까지, 권력의 정도에 따라 등급이 나뉘어 칸에 탑승해서 살고 있다. 그 권력은 탑승시 구매한 티켓가에 의해 나눠진 것인데, 이들이 사실 원래 어떤 삶을 살고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보스턴 오케스트라 수석 바이올리니스트라도 처음에 꼴등칸에 올라탔다면 꼴등칸 사람인 거니까. (그렇지만 예술적 재능을 가진 자는 금방 일등칸의 삶을 누릴 수 있게 된다! 하! )
꼴등칸의 사람들은 흑인에서부터 동양인 등 다양한 인종이 어우러져 살고 있다. 그런데 주인공들이 앞칸으로 나아갈 수록, 인구의 다양성은 사라지고 백인 위주로 구성된 일등칸 승객들이 보이는데, 이것도 의도적인 거겠지.

Integral Violence
그 기차의 질서를 유지하는 실질적인 '군인'들은 영어로 상명하달을 받지만, 가끔 일본어로 의사소통을 하더라. 또 그 밑에서 피튀기며 싸우는 자들은 복면을 했고. 개인적으로 받은 느낌일지는 몰라도 복면군단은 테러리스트, 아랍, 러시아가 떠올라서 섬뜩했다. 전쟁의 주범들이잖아. 전쟁으로 '질서를 유지'한다는 걸까. 세상에는 전쟁이, 불가결하다는걸까.

In the name of the Belief
자신의 팔과 다리를 식량으로 내놓는 사람을, 어느 누가 믿고 따르지 않을 수 있을까. 문제는, 이 인물도 인간이고, 이를 따르는 자들도 인간이라는 거. 무엇이 옳은 것이고 무엇이 그른 것인지, 내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한번 더 생각해봐도 모자란다. 그 생각이라는 게,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거든. 그리고, 생각보다 쉽게 바뀌지 않거든. 
영화가 끝나고 나니, 나부끼는 붉은 십자가 그려진 깃발과, 온 몸에 폭탄을 두른 여인, 딸을 죽이는 아버지, 집단 자살한 미국의 한 마을, 전기고문을 받는 동성애자들이 떠올랐다. 

I want YOU
윌포드가 붉은 쪽지를 보낸 자란다. 그는 대체 왜 자신의 후계자를 꼬리칸 사람중에서 골랐을까? 
앞칸 사람들은 워낙 그렇게 부족함 없이 자랐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꼬리칸 사람들을 본 적도 없고, 존재를 잊고 산다. 하지만 '기차'가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 꼬리칸 사람들은 필수다. 앞칸 사람들이 '희생'을 할 수는 없으니까. 기차가 잘 돌아가려면, 꼬리칸 사람들을 항상 자기들 밑에 두고 질서를 유지해야 하는데, 커티스가 그러기에 적격이라 판단했을까? 이미 길리엄의 '선행'으로 인해 개과천선한 인물인데? 
사실, 난 윌포드가 그냥 심심해서 그랬을 거 같기도 하다. 기차세계의 '신'으로써 신탁을 내린거지. 돌고도는 일상에 재미있는 사건 하나 만들어보려고. 뭐, 진짜로 찾아올 줄은 몰랐겠지만, 그럼 그냥 넘겨주면 그만이고. 커티스는 이 기차의 모든 칸을 다 가봤으니, '질서 유지'가 필수라는 걸 알고 있겠지. 그리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이자가 열받아서 앞칸 사람들을 몰살한다고 해도, 결국 기차는 다시 채워질 것이고, 칸마다 사람이 나뉘어질 거라고, 윌포드는 생각했을 것이다.

Iona
(이렇게 쓰는게 맞나 모르겠다만 다 I로 시작하게 썼으니까 헴헴..) 
요나는 기차 안에서 태어난 소녀이다. '흙'이 뭔지도 모르고, '땅'을 밟아본 적도 없다. 그나마도 감옥에 갇혀 살아서, '세상'을 제대로 본 적도 없다. 그런 그녀가, 이 달리는 열차를, 돌고도는 세상을, 멈춘다. 이 끔찍한 뫼비우스의 굴레를 끊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것이 작은 소녀라니,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랑 봉감독님은 '소녀'의 무한능력에 대해 뭔가 공유하고 계신듯 하다. 

영어제목이 왜 Snowpiercer인지 궁금했는데 요나(고아성)를 가리키는 말인갑다. 사전에 Piercer가 뚫는 것 말고도 '꿰뚫어 보는 눈'이라는 뜻이 있다니 말이다. ('설국열차'라니까 보지도 않은 일본 영화가 먼저 생각나버려서 조금 아쉽다. 제목이 그냥 <눈> 이었어도 좋을법 했는데...ㅎ)


Inquiries
자, 여기서부터 궁금한 점들. 
봉감독님이 한국사람이니까 한국인 부녀를 '열쇠를 쥔' 인물로 설정한건 알겠는데, 기술력을 갖췄지만 서구의 권력에 매여 자유롭지 못한걸 상징하려 했을까? 이들은 기회의 손길이 오지 않았다면 계속 거기 그렇게 갇혀있었을건가? 아님 누군가 먼저 시작해서 거기 따라가다가 자기 원하는 걸 하려고 기회를 엿본걸까? 마지막 순간에 배신을 하는건 우발적이었던걸까? 7인 동상(그야말로 동상!) 을 보면, 엔진을 멈춰야만 나갈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왜 굳이 첫 칸까지 문을 열어주며 따라갔나?
그리고 요나의 투시력이 그렇게 중요하고 놀라운 능력인데, 커티스는 왜 그리 캐쥬얼하게 '밥은 먹었니?'라고 물어보듯' 너 투시력 있니?'라 물은걸까...하긴 17년째 똑같은 궤도를 돌고 있는 기차 속 세계에선 그정도는 암것도 아닌걸까.


In the End
74%를 수동으로 유지하겠다면, 언젠가는...앞칸 사람들도 통제해야 할 날이 왔을거다.
기차가 그 전에 멈춰서, 참 다행이다.

요나는, 관습에 얽매이지 않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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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쯔가 본 : 영화 <헬프(The Help)>  (0) 2011.11.04
칼바람을 뚫고 보러 가길 잘 했다.

연극 <극적인 하룻밤> 이후 두 번째로 찾은 연우소극장. 연극을 볼 때는 몰랐는데 이번에는 뮤지컬 라이브 연주팀이(소극장인데도 라이브!) 자리해서 그런지 무대가 굉장히 좁게 느껴졌다. 게다가 내 앞뒤양옆으로 서로 너무나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던 단체관람객들 사이에 앉아 있자니 자리도 어색하고 답답하기만 했다.

그러나 극이 시작되자 그 답답함은 어느새 사라졌다.
혁명의 불이 타오르던 격동기, 18세기 프랑스와 19세기 조선을 넘나드는 복잡하고도 묵직한 이야기였지만 호흡이 빨라서 금방 빠져들었다. 무대가 점점 커졌다.세 명의 배우가 여섯 명을 연기하고, 소품도 무대장치도 의상도 어느하나 화려하지 않았지만 어느 장면에서 세느강이, 또 그 강이 언제 한강으로 바뀌어 흐르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드럼의 라이브 연주에 맞춰 현대적인 안무로 표현한 레옹과 피에르의 듀엘링 장면이었다. 작가가 '이 장면엔 안무를 이용해야지' 하고 쓴 것일까? 아님 연출가가 고안해서 안무가에게 의뢰한걸까? 그런 게 참 궁금하다.

뮤지컬 <라 레볼뤼시옹>을 보며연출가는 공연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모 연출가의 무개념 트윗으로 인해 뮤지컬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쓰라리게 했던 일명 'ㅆㄹㅁ 사태'로 얼룩졌던 오늘, 아니 어제의 타임라인, 그 연출가도 잠시 잊었던 거라 생각해야겠지. 관객도 공연을 이루는 존재라는 것을. (그리고 그대에게 빵X밥O을 주는 사람이다!)

토달기 : 예전에 (다른 작가이지만)<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볼 때도 가사가 입에 맞지 않아 어색하고 힘들었는데 오늘 <라 레볼뤼시옹>을 보고 나니 그런 것이 혹 소격효과를 노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 음표 안에 우겨넣은 다섯음절을 들을 때마다 깜짝깜짝 놀랐으니까;

아...양 옆에서 눈물 쏟는 관객들 사이에 똘망똘망하게 눈을 빛내고 앉아 '공부'하고있는 내 자신이 참...아직은 공연을 좀 즐겨도 되지 않나? 온전히 순수한 마음으로 보고 모든 공연에 열광했던 때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함께 웃고 울고 노래할 수 있는, 그런 관객의 자세는 잃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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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쯔가 본: 뮤지컬 <가야십이지곡>  (0) 2015.01.30
방금 처음으로, 자진해서, 홀로 영화를 보러 다녀왔다.
영화가 보고싶어 개봉일을 기다린 적은 많지만 정작 개봉 당일에 영화를 본 적은 없었는데 오늘은 희한하게도, 동행이 없는데도, 집에서 편히 쉬다 나가는 것이 귀찮을법 했을텐데도, 영화관으로 발길이 닿았다.


이야기가 있는 포스터_



얼마 전, 길을 가다 영화 포스터를 하나 봤는데 노란 배경이라 눈에 확 띄었다. 그리고 네 명의 여자가 있는데 엇, 벤치에 앉은 여인네들의 머리모양이 심상치 않은 것이다. 헤어스프레이를 잔뜩 뿌려 부풀린 머리에 화려한 꽃무늬 치마! 우와..이것은 딴따라땐스홀에서 추구하는 5,60년대 스타일이 아닌가. 나는 뮤지컬 '헤어스프레이'같이 음악과 춤이 있는 화려한 영화가 아닐까 하고 잠시, 아주 잠시 생각했다. (물론 아주 몇 초간이었다)

포스터를 조금 더 뜯어보면 이 영화는 5,60년대가 배경이고, 인종차별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고, 가운데 앉아 우리를 응시하는 저 아이가 주인공격일 거라는 걸 알 수 있다. 뭐 영어를 좀 하는 사람이라면 제목인 '헬프'는 흑인 가정부를 부르는 용어라는 것까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 숨어있는, 여러가지 메시지가 있다.
(영화를 보고 나니 내가 보지 못했던 부분이 다시 보여서 몇 가지 적어볼까 한다. 스포일러 지뢰는 알아서 피하길)
가운데 앉아있는 여자아이는 금발 머리에 파란...눈인지는 보이지 않지만 어쨌든 백인이다. 그녀는 옆에 앉은 여자에 비하면 화려하지는 않지만 예쁜 옷을 입고 있다. 옆에 앉은 여자는 절대 손에 물도 묻힐 것 같지 않게 생겼다. 저런 옷과 저런 머리는 사교 모임에나 어울리는 모습이지. 피부색이 밝은 이 두여자는 벤치에 앉아있다. 그런데 시선을 보자. 가운데 앉은 아이는 우리를 응시하고 있지만 옆에 앉은 꽃무니옷의 그녀는 손톱의 때라도 감상하는 듯, 다른 곳을 보고 있다. 현실을 외면하고 모든것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그녀의 캐릭터를 보여주는 것 같다.
이제 왼쪽에 서 있는 흑인 여성들을 보자. 앞치마를 맨 것 보니 집안일을 하는 사람인 것 같은데, 어, 둘의 옷이 똑같다. 가정부 유니폼인가보다. 자세히 보니 벤치에 앉은 아이들의 엄마뻘 정도 되어보이는데, 옆에 서서 있다. 애들은 비킬 생각도 안한다.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머리에 피도 안마른 것들에게조차 공경을 받지 못하는 모습이다. 어 그런데 재밌는 것은 미니(어이쿠, 이름이 나와버렸네. 근데 정말 강렬한 그녀의 캐릭터와 이름이 너무 잘 어울려서 자꾸 부르게 된다;) 의 손이다. 공손하게 앞에 포개어져 있지만 얼굴을 보니 뭔가 뒷담화를 하는 것 같다. 그리고 맨 왼쪽에 서 있는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인 에이블린은 고개를 약간 기울여 미니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데 어허, 손이 주머니에 들어가 있다! 무슨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영화의 얼굴인 포스터를 만들면서 이렇게 공을 들이는 제작자는 여태껏 못 본 것 같다. (있다면 제보 부탁) 보기 전에는 궁금증을 자아내고, 보고 난 후에는 보이지 않던 조각들이 보이면서 다시 찬찬히 보는 재미를 준다.



우리를 도와주는 이들, 우리가 잊고 사는 이들_

영화의 제목을 짓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책이 원작이라고 하니 책의 저자가, 아니, 편집장인가? 어쨌든) 제목 '헬프'는 이 작품을 한마디로 설명하는 단어, 그야말로 굉장한 센스이다. 우리가 '도우미'라고 하듯, 외국에서도 가정부를 'The Help'라고 부른다. Helper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도움을 주는 모든 이를 지칭하는 단어이지만 the help는 미국에서 가정부를 뜻하는 고유명사이다. 동시에 이 작품을 관통하는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기도 한다.
처음 '헬프'라는 제목을 봤을 때 비틀즈의 노래 'HELP!'가 귀에서 맴돌며 그 파란 옷을 입고 한 명씩 수기신호(手旗信號)로 HELP를 외치는 그림이 동동 맴돌았다. 뭐 아주 틀린것은 아닌것이, 이 앨범이 나온 해가 1965년, 그리고 영화 <헬프>의 배경이 1960년대라는 것이다. (http://en.wikipedia.org/wiki/Help!_(album))
1960년대 한국에선 우리 부모님이 막 초딩 또는 유딩의 단계에 있었을 테지. 그런데 여기 포스터에 앉아있는 주인공 아이 '스키터'가 이십대 후반으로 나온다..그렇다면 그녀는 우리 할머니 뻘? 이라는 셈이 되지. 요는, 이 이야기가 아주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할머니 뿐만 아니라 우리 아빠도, 엄마도 존재하던 시절이다. 
그 시절 미국에서는 흑인과 백인이 'Separate but Equal'이라는 말도 안되는 슬로건 하에 버스의 자리도, 주거지역도, 심지어 화장실까지도 따로 사용했어야 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했어도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번번한 직장은 구하기 힘들었고, 그마저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은 또다시 가정부가 되어 부모와 같은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문장에서 '유색인종' 이라는 말을 '외국인 노동자'로 바꿔보자.

"아무리 공부를 많이 했어도 외국인 노동자라는 이유로 번번한 직장은 구하기 힘들었고.... "

'따로 그러나 평등하게'라는 개떡같은 슬로건은 없지만 우리는 저도 모르게 그들과 나 사이에 벽을 만들고 만다. 어릴적 유럽에서 살며 동양인이라 손가락질 받았던 기억때문에 나는 그렇지 않을거다 생각했는데, 부끄럽지만 나도 벽이 있더라. 더 충격적인건, 나도 모르게, 백인과 흑인과 동남아시아 외국인들을 다르게 대하고 있다는 거였다.

일요일마다 혜화동 성당 앞에는 동남아시아 장터가 열린다. 망고에서부터 핸드폰까지 없는 게 없다. 어느 일요일, 나는 혜화동을 지나는 버스를 타고 깜짝 놀랐다. 버스 안에 들어가자 마치 동남아의 어느 도시에 도착한 듯,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가득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리가 듬성듬성 있었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그 옆에 앉지 않았다. 갈 길이 먼 것도 아니었긴 하지만 왠지, 그 사람들 사이에 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서울에서 가장 외국인을 쉽게 만날 수 있는 길은 바로 지하철 6호선을 타는 게 아닌가 싶다. 이유는 바로 이태원 프리덤~이 아니라 이태원 때문이다. 외국인 관광객도, expat(국외 거주자.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도 이태원에 넘쳐난다. 그런데 지하철에서 안경을 끼고 책을 읽고 있는 흑인과, 맥주병을 홀짝대는 백인을 본 적이 있다. 부끄럽지만 후자를 봤을 때보다 전자를 봤을 때 더 놀랐다. 내 머릿속에서 흑인=교사 의 공식이 성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인은 영어를 잘 하고 학원이나 학교에서 영어강사를 할 것이며 동남아 사람들은 어느 공장에 다니거나 농촌 노총각과 결혼한 사이일 것이며, 흑인은 좀 무섭다.'

정말 미친듯이 부끄럽지만 내 머릿속엔 윗 문장이 어딘가에 박혀 있는 것 같다. 방송 등 각종 매체를 탓할 생각은 없다. 대부분의 백인이 영어강사를 하고 있고(영어를 정말 못하는 프랑스녀석조차 백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영어학원에 취직되는 세상이니) 동남아 사람들이 공장 등 일명 3D업종에서 많이들 일하고 있고 흑인은..말투가 좀 무섭....?! 뭐 어쨌든 많은 부분에서 일치하긴 한다. 그러나 백인 중에서도 영어권이 아닌 곳에서 온 사람들도 굉장히 많고, 미군중에는 자기 이름도 잘 못쓰는 바보들도 있다. 우리나라 유명 대학으로 유학온 동남아 학생들도 있을 것이고 흑인은..흑인이라서 무섭다는건 말도 안되는 일이다. 안다.

내 안에서 이 편견의 벽은 그다지 높지는 않다. 하지만 문지방을 지날 때 잘못하면 발이 찧어서 아프듯, 이렇게 어떤 계기로 벽을 발견할 때마다 벽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 벽을 넘어가는 행동이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꾸 사고나 치고 다니는 미군 말고는 우리나라에서 외국인의 존재는 필요불가결한 존재가 되었다. 유치원, 아니 말도 제대로 못하는 아이들이 다니는 시설부터 원어민 교사 열풍에, 가방끈이 길어진 한국 젊은이들이 기피하는 3D업종, 농사짓는 노총각에겐 시집가려 하지 않는 아가씨들. 각자의 사연을 들고 바다를 건너온 외국인들이 이 자리를 메꿔주고 있다.

좋아하는 독일 밴드 Wir Sind Helden의 노래중에 아주 긴 제목의 노래가 하나 있다.
<Ich werde mein Leben lang üben, dich so zu lieben, wie ich dich lieben will, wenn du gehst>
"나는 평생 연습할 것입니다. 당신을 사랑하도록. 당신이 떠날 때 내가 당신을 사랑할 것 처럼"

혼자 살 수 있는 인간은 없다.
공기와 물, 빛과 바람, 벼농사를 짓는 농부, 쓰레기를 치워주는 환경미화원, 그리고 정치인들조차도.
내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고,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그 사람이, 그 존재가 나를 떠난다면? 내 앞에서 사라져 버린다면?

그러니 감사하자. 우리가 가끔 잊고 사는 존재들을 위해.

자. 나의 고백은 끝났다. 하지만 부끄러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면 몇번이고 더 고백할 것이다.

그대들도 준비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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