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처음으로, 자진해서, 홀로 영화를 보러 다녀왔다.
영화가 보고싶어 개봉일을 기다린 적은 많지만 정작 개봉 당일에 영화를 본 적은 없었는데 오늘은 희한하게도, 동행이 없는데도, 집에서 편히 쉬다 나가는 것이 귀찮을법 했을텐데도, 영화관으로 발길이 닿았다.


이야기가 있는 포스터_



얼마 전, 길을 가다 영화 포스터를 하나 봤는데 노란 배경이라 눈에 확 띄었다. 그리고 네 명의 여자가 있는데 엇, 벤치에 앉은 여인네들의 머리모양이 심상치 않은 것이다. 헤어스프레이를 잔뜩 뿌려 부풀린 머리에 화려한 꽃무늬 치마! 우와..이것은 딴따라땐스홀에서 추구하는 5,60년대 스타일이 아닌가. 나는 뮤지컬 '헤어스프레이'같이 음악과 춤이 있는 화려한 영화가 아닐까 하고 잠시, 아주 잠시 생각했다. (물론 아주 몇 초간이었다)

포스터를 조금 더 뜯어보면 이 영화는 5,60년대가 배경이고, 인종차별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고, 가운데 앉아 우리를 응시하는 저 아이가 주인공격일 거라는 걸 알 수 있다. 뭐 영어를 좀 하는 사람이라면 제목인 '헬프'는 흑인 가정부를 부르는 용어라는 것까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 숨어있는, 여러가지 메시지가 있다.
(영화를 보고 나니 내가 보지 못했던 부분이 다시 보여서 몇 가지 적어볼까 한다. 스포일러 지뢰는 알아서 피하길)
가운데 앉아있는 여자아이는 금발 머리에 파란...눈인지는 보이지 않지만 어쨌든 백인이다. 그녀는 옆에 앉은 여자에 비하면 화려하지는 않지만 예쁜 옷을 입고 있다. 옆에 앉은 여자는 절대 손에 물도 묻힐 것 같지 않게 생겼다. 저런 옷과 저런 머리는 사교 모임에나 어울리는 모습이지. 피부색이 밝은 이 두여자는 벤치에 앉아있다. 그런데 시선을 보자. 가운데 앉은 아이는 우리를 응시하고 있지만 옆에 앉은 꽃무니옷의 그녀는 손톱의 때라도 감상하는 듯, 다른 곳을 보고 있다. 현실을 외면하고 모든것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그녀의 캐릭터를 보여주는 것 같다.
이제 왼쪽에 서 있는 흑인 여성들을 보자. 앞치마를 맨 것 보니 집안일을 하는 사람인 것 같은데, 어, 둘의 옷이 똑같다. 가정부 유니폼인가보다. 자세히 보니 벤치에 앉은 아이들의 엄마뻘 정도 되어보이는데, 옆에 서서 있다. 애들은 비킬 생각도 안한다.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머리에 피도 안마른 것들에게조차 공경을 받지 못하는 모습이다. 어 그런데 재밌는 것은 미니(어이쿠, 이름이 나와버렸네. 근데 정말 강렬한 그녀의 캐릭터와 이름이 너무 잘 어울려서 자꾸 부르게 된다;) 의 손이다. 공손하게 앞에 포개어져 있지만 얼굴을 보니 뭔가 뒷담화를 하는 것 같다. 그리고 맨 왼쪽에 서 있는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인 에이블린은 고개를 약간 기울여 미니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데 어허, 손이 주머니에 들어가 있다! 무슨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영화의 얼굴인 포스터를 만들면서 이렇게 공을 들이는 제작자는 여태껏 못 본 것 같다. (있다면 제보 부탁) 보기 전에는 궁금증을 자아내고, 보고 난 후에는 보이지 않던 조각들이 보이면서 다시 찬찬히 보는 재미를 준다.



우리를 도와주는 이들, 우리가 잊고 사는 이들_

영화의 제목을 짓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책이 원작이라고 하니 책의 저자가, 아니, 편집장인가? 어쨌든) 제목 '헬프'는 이 작품을 한마디로 설명하는 단어, 그야말로 굉장한 센스이다. 우리가 '도우미'라고 하듯, 외국에서도 가정부를 'The Help'라고 부른다. Helper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도움을 주는 모든 이를 지칭하는 단어이지만 the help는 미국에서 가정부를 뜻하는 고유명사이다. 동시에 이 작품을 관통하는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기도 한다.
처음 '헬프'라는 제목을 봤을 때 비틀즈의 노래 'HELP!'가 귀에서 맴돌며 그 파란 옷을 입고 한 명씩 수기신호(手旗信號)로 HELP를 외치는 그림이 동동 맴돌았다. 뭐 아주 틀린것은 아닌것이, 이 앨범이 나온 해가 1965년, 그리고 영화 <헬프>의 배경이 1960년대라는 것이다. (http://en.wikipedia.org/wiki/Help!_(album))
1960년대 한국에선 우리 부모님이 막 초딩 또는 유딩의 단계에 있었을 테지. 그런데 여기 포스터에 앉아있는 주인공 아이 '스키터'가 이십대 후반으로 나온다..그렇다면 그녀는 우리 할머니 뻘? 이라는 셈이 되지. 요는, 이 이야기가 아주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할머니 뿐만 아니라 우리 아빠도, 엄마도 존재하던 시절이다. 
그 시절 미국에서는 흑인과 백인이 'Separate but Equal'이라는 말도 안되는 슬로건 하에 버스의 자리도, 주거지역도, 심지어 화장실까지도 따로 사용했어야 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했어도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번번한 직장은 구하기 힘들었고, 그마저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은 또다시 가정부가 되어 부모와 같은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문장에서 '유색인종' 이라는 말을 '외국인 노동자'로 바꿔보자.

"아무리 공부를 많이 했어도 외국인 노동자라는 이유로 번번한 직장은 구하기 힘들었고.... "

'따로 그러나 평등하게'라는 개떡같은 슬로건은 없지만 우리는 저도 모르게 그들과 나 사이에 벽을 만들고 만다. 어릴적 유럽에서 살며 동양인이라 손가락질 받았던 기억때문에 나는 그렇지 않을거다 생각했는데, 부끄럽지만 나도 벽이 있더라. 더 충격적인건, 나도 모르게, 백인과 흑인과 동남아시아 외국인들을 다르게 대하고 있다는 거였다.

일요일마다 혜화동 성당 앞에는 동남아시아 장터가 열린다. 망고에서부터 핸드폰까지 없는 게 없다. 어느 일요일, 나는 혜화동을 지나는 버스를 타고 깜짝 놀랐다. 버스 안에 들어가자 마치 동남아의 어느 도시에 도착한 듯,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가득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리가 듬성듬성 있었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그 옆에 앉지 않았다. 갈 길이 먼 것도 아니었긴 하지만 왠지, 그 사람들 사이에 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서울에서 가장 외국인을 쉽게 만날 수 있는 길은 바로 지하철 6호선을 타는 게 아닌가 싶다. 이유는 바로 이태원 프리덤~이 아니라 이태원 때문이다. 외국인 관광객도, expat(국외 거주자.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도 이태원에 넘쳐난다. 그런데 지하철에서 안경을 끼고 책을 읽고 있는 흑인과, 맥주병을 홀짝대는 백인을 본 적이 있다. 부끄럽지만 후자를 봤을 때보다 전자를 봤을 때 더 놀랐다. 내 머릿속에서 흑인=교사 의 공식이 성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인은 영어를 잘 하고 학원이나 학교에서 영어강사를 할 것이며 동남아 사람들은 어느 공장에 다니거나 농촌 노총각과 결혼한 사이일 것이며, 흑인은 좀 무섭다.'

정말 미친듯이 부끄럽지만 내 머릿속엔 윗 문장이 어딘가에 박혀 있는 것 같다. 방송 등 각종 매체를 탓할 생각은 없다. 대부분의 백인이 영어강사를 하고 있고(영어를 정말 못하는 프랑스녀석조차 백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영어학원에 취직되는 세상이니) 동남아 사람들이 공장 등 일명 3D업종에서 많이들 일하고 있고 흑인은..말투가 좀 무섭....?! 뭐 어쨌든 많은 부분에서 일치하긴 한다. 그러나 백인 중에서도 영어권이 아닌 곳에서 온 사람들도 굉장히 많고, 미군중에는 자기 이름도 잘 못쓰는 바보들도 있다. 우리나라 유명 대학으로 유학온 동남아 학생들도 있을 것이고 흑인은..흑인이라서 무섭다는건 말도 안되는 일이다. 안다.

내 안에서 이 편견의 벽은 그다지 높지는 않다. 하지만 문지방을 지날 때 잘못하면 발이 찧어서 아프듯, 이렇게 어떤 계기로 벽을 발견할 때마다 벽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 벽을 넘어가는 행동이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꾸 사고나 치고 다니는 미군 말고는 우리나라에서 외국인의 존재는 필요불가결한 존재가 되었다. 유치원, 아니 말도 제대로 못하는 아이들이 다니는 시설부터 원어민 교사 열풍에, 가방끈이 길어진 한국 젊은이들이 기피하는 3D업종, 농사짓는 노총각에겐 시집가려 하지 않는 아가씨들. 각자의 사연을 들고 바다를 건너온 외국인들이 이 자리를 메꿔주고 있다.

좋아하는 독일 밴드 Wir Sind Helden의 노래중에 아주 긴 제목의 노래가 하나 있다.
<Ich werde mein Leben lang üben, dich so zu lieben, wie ich dich lieben will, wenn du gehst>
"나는 평생 연습할 것입니다. 당신을 사랑하도록. 당신이 떠날 때 내가 당신을 사랑할 것 처럼"

혼자 살 수 있는 인간은 없다.
공기와 물, 빛과 바람, 벼농사를 짓는 농부, 쓰레기를 치워주는 환경미화원, 그리고 정치인들조차도.
내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고,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그 사람이, 그 존재가 나를 떠난다면? 내 앞에서 사라져 버린다면?

그러니 감사하자. 우리가 가끔 잊고 사는 존재들을 위해.

자. 나의 고백은 끝났다. 하지만 부끄러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면 몇번이고 더 고백할 것이다.

그대들도 준비되었나?

'Reviews > 영화를 보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샤쯔가 본 영화 : <설국열차>  (0) 2013.08.05

+ Recent posts